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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산불 완전히 진화, 사라지지 않은 상흔

by 시사싱싱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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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꺼진 불,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상흔

 

무관심과 관행이 부른 '불의 시대'
불에 잠긴 문화유산, 꺼져버린 천년의 시간
불을 막은 사람들, 그들의 시간
앞으로는 달라져야 한다.

 

산불 진화 현장 '끝내 꺼진 불,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상흔'

 

2025년 봄, 우리는 ‘산불’이 아닌 ‘참사’라는 단어를 더 자주 떠올렸다.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불씨는 삽시간에 산줄기를 타고 번져나갔고, 안동과 청송, 영양과 영덕까지, 다섯 개 시군은 연기에 잠겼다. 이 불길은 서울 면적의 80%에 해당하는 45천여 헥타르를 태웠고, 산림뿐 아니라 삶도, 기억도, 문화도 무너뜨렸다. 30명의 생명이 사라졌고, 45명이 다쳤으며, 이재민은 3,773명에 달했다. 한국의 산불 기록 중 가장 큰 피해였다.

 

무관심과 관행이 부른 '불의 시대'

322일 오전, 의성 안평면의 한 야산. 조부모 묘소를 손질하던 50대 남성의 부주의에서 시작된 불은, 경찰 수사 결과 불법 소각 정황과 여러 증거로 인해 실화 혐의가 적용되었다. 현장에서는 라이터와 소주병 뚜껑이 발견되었고, 그의 딸이 직접 119에 신고하며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이후 3시간 뒤, 또 다른 불씨가 안계면의 한 과수원에서 솟구쳤다. 농사용 쓰레기를 태우다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산불은 남서풍을 타고 안동으로 번졌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위협했다. 이 일대 주민들 증언에 따르면 해당 지역은 평소에도 소각 행위가 빈번했다고 한다. 결국, 불은 사람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불에 잠긴 문화유산, 꺼져버린 천년의 시간

산불이 삼킨 것은 나무와 초가만이 아니었다. 보물 2건을 포함한 국가 지정 문화재 11, 지방유산 19건이 손상을 입었고, 그중 12건은 완전히 소실됐다. 고운사는 불길에 전소되어 연수전과 가운루라는 보물급 건축물이 사라졌고, 청송의 사남고택, 안동의 지산서당 등 지역의 오랜 삶의 흔적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이는 2005년 낙산사 화재 이후에도 우리 사회가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방염포는 있지만 사용 지침이 없고, 무인 진화 장비는 권고일 뿐 강제는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고온에 견디는 방재 장비 도입과 사찰과 숲 사이의 방화 거리 확보, 그리고 문화유산별 맞춤형 매뉴얼 구축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불을 막은 사람들, 그들의 시간

하루 천 명 이상이 투입되어 열흘간 이어진 진화 작업. 50대 헬기, 200대가 넘는 장비, 밤낮없이 이어진 긴박한 싸움 속에서 26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택과 공장 4천여 채, 농기계와 하우스 수백 동이 전소되었으며, 청송 일대에서는 아직도 잔불 감시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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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대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식당의 모습

 

무너진 삶은 천천히 복구되고 있지만, 대피소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재민들의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불길은 사라졌지만, 불이 지나간 자리엔 생의 균열만이 남았다.

 

따뜻한 밥 한 끼, 인간의 마음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사람은 사람을 기억했다. 청송 주왕산 근처 식당 한 곳에서는 진화 작업 중인 산림청 직원들과 소방대원들에게 정성껏 비빔밥을 대접했다. 사장님은 매 끼니마다 일일이 정말 고생 많다”라고” 인사했고, 김밥으로 허기를 달래던 이들에게 그 말과 밥은 큰 위로가 되었다. 한 진화대원은 이후에 꼭 여행으로 다시 오겠다며 식당을 떠났다. 재난 속에서도 잊지 않은 것은 온기였고, 그것은 작은 연대이자 위로였다.

 

다시는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이번 산불은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인간의 무관심과 오래된 관행, 그리고 제도의 허술함이 만든 복합 재난이었다. 강풍과 고온은 분명 불씨를 키웠지만, 애초에 불을 지핀 건 인간이었다.

 

앞으로는 달라져야 한다.

불법 소각 행위에 대한 강력한 형사처벌

문화재 방재 관련 법 제정 및 장비 도입 기준 수립

산불 대응 매뉴얼의 정비 및 고도화

예방 중심의 공공 교육 및 계도

산촌 지역에 드론 감시 및 무인 소화 시스템 배치

기억으로 남기고, 시스템으로 바꾸자

 

산불은 진화되더라도, 그 자국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 단지 불을 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불이 시작됐는지를 짚고, 다음 세대엔 같은 실수를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을 이어가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잊히지 않도록.

 

우리가 잿더미에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억과 시스템을 함께 바꾸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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