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경남 대형 산불. 3월 31일 이후
불은 지나갔고, 산은 아직 울고 있다
불타 버린 것과 되살아나는 것에 대하여
1. 열흘이었다.
열흘 동안 불은 산을 갉아먹고, 나무의 골수까지 파고들었다.
213시간, 인간은 끊임없이 물을 퍼 올렸지만,
불은 좀비처럼 되살아났다.
낙엽의 무늬 아래, 암석의 주름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붉은 점 하나가
어느 순간 산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건 어마어마한 화염이자 시간의 역류였다.
산은 오랜 세월 쌓아온 푸름을 하루아침에 잃었고
사람들은 그 잃어버린 푸름의 일부였다.
숲 속에서 태어나고 늙어가던 바람,
낙엽을 베개 삼아 잠들던 짐승의 숨결,
그 모든 생명이 연기 속으로 흩어졌다.
2. 3,600여 채의 집이 불탔다.
숲은 사라졌고, 어획장도 바다도 재로 변했다.
이 숫자들은 사실,
집을 잃은 노인의 눈동자 한가운데서
이미 오래전에 울리고 있던 경보음이었다.
불은 들리지 않는 언어다.
그러나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말이 남는다.
검게 탄 기둥, 뒤틀린 지붕,
그리고 귀가하지 못한 2,800여 명의 이재민.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시간은 여전히 3월에 머물러 있다.
불탄 집은 벽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솜이불 위에 남은 누군가의 체온,
고무줄로 묶인 편지 다발,
정성스레 말려둔 마른 고추 몇 줌까지
모두가 불과 함께 사라졌다.
숫자는 슬픔을 계산하지 못한다.
3. 조릿대가 탄다
속이 빈 줄기에서, 불이 수류탄처럼 퍼져나간다.
굴참나무는 그 위로, 소나무는 더 위로 불을 넘긴다.
불은 땅에서 하늘로
사다리를 타고 오르며
연기와 재, 생명을 가른다.
불이 위로만 오르지 않았다.
때로는 바람을 따라 옆으로,
때로는 나무뿌리를 타고 아래로 침투했다.
생물의 사다리를 타고 불도 이동했다.
조릿대에서 꿩으로, 꿩에서 어린 짐승으로.
사람이 만든 사다리가 아닌,
자연의 슬픈 유전자가 불을 키웠다.
4. 좀비 불씨
진화가 끝났다고 믿었던 순간,
숯 더미 아래의 온도는 600도.
헬기가 다녀간 자리에 다시 연기가 피어난다.
불은 살아 있었다.
죽은 것이 아니라, 기다린 것이었다.
잔불은 언젠가 다시 살아난다.
기억처럼, 억눌린 분노처럼.
낙엽의 습도, 뿌리의 열기, 바람의 방향,
모든 게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엔 패턴이 있었다.
자연이 학습한 방식대로
불은 스스로 되살아나는 법을 알았다.
5. 생태계는, 쉽게 복원되지 않는다
숲이 다시 숲이 되기까지, 최소 30년.
뿌리와 줄기, 흙과 이끼, 그리고 곤충 하나까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려면
100년이 걸릴 수도 있다.
시간은 나무만 자라게 하지 않는다.
시간은 연결을 만든다.
다시 자란다고 해서 예전의 숲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다.
생물 사이의 거리, 종의 다양성, 미생물의 순환…
이 모든 것은 천천히, 느리게,
잊힌 듯 복원된다.
숲이 다시 살아나는 건
숲이 서로를 다시 알아보게 될 때다.
6. 강원도 고성의 숲은
20년이 지났어도 아직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소나무는 살아남지만, 토양은 말이 없다.
포유류는 떠났고 개미는 돌아오지 않았다.
숲은 나무가 아니라 관계의 총합이다.
회복은 심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다.
토양 위에 묘목을 꽂는 일보다
토양 아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 더 어렵다.
생태계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산불은 그 관계를 한꺼번에 끊는다.
회복이 오래 걸리는 건,
숲이 다시 서로를 신뢰하게 될 때까지의 시간 때문이다.
7.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은
사소한 실화였다.
한 사람이 태운 쓰레기,
그 불씨 하나가
산과 바다, 문화재까지 태워버렸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산불 대부분은
천둥도, 벼락도 아닌
사람의 손에서 시작된다.
그 손은 불을 붙이고,
또 다른 손은 그것을 꺼내느라
열흘을 밤새운다.
재앙은 소리 없이 시작된다.
무심한 습관, 반복되는 부주의,
'이번만은 괜찮겠지' 하는 자기합리화.
숲은 그것을 오래도록 참고 있다가
결국 고요한 분노로 터져버린다.
자연은 관용하지만,
한계는 있다.
8. 산림청은 말한다
임도를 넓히고, 헬기를 늘리고,
조릿대를 제거하고, 수종을 교체하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에게 불이 아니라
숲의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
땅의 축적된 시간을
존중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예방은 기술이 아니라 감성에서 시작된다.
숲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숲과 오래 함께한 존재로서
서로를 존중할 줄 아는 예민한 감각,
공존의 리듬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는 오만이
불씨 하나로 꺾이는 순간을
우리는 이미 수없이 목격했다.
9. 숲은 다시 자랄 것이다
그러나 잃은 건 숲만이 아니다.
삶의 자리, 말 없는 기억,
그리고 불타기 전의 풍경.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하는 것이다.
불은 사라졌고,
산은 여전히 울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슬픔에 머무는 일이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기를,
숲이 우리를 용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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