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땅의 시간, 그리고 우리가 마주한 질문
미얀마 지진과 세계가 응답해야 할 이유
- 땅이 먼저 말을 걸었다: 시작된 균열과 첫 목소리
- 무너진 신전, 무너진 신념
- 국경 너머로 번지는 고통과 생명
- 연대는 기술보다 빠르게 도착해야만
그날, 땅은 말보다 먼저 움직였다.
모든 예고 없이, 미얀마 중부를 가로지른 충격은 한순간에 도시를 기울이고 기억을 갈라놓았다.
한때 건물이었던 것들은 가로수처럼 꺾였고, 길바닥은 더 이상 걷는 곳이 아니라, 무너진 것들이 잠든 무덤이 되었다.
113년 만의 지진, 규모 7.7.
이것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수천 개의 목숨을 가른 선이었다.
사람들은 그 순간 말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달리고, 울고, 주저앉았다.
만달레이의 거리에서 누군가는 손으로 잔해를 파헤쳤고, 누군가는 잔해 아래서 “살려달라”라고 외쳤다.
그 외침은 언어라기보다 생존의 맥박이었고, 비명보다는 오래된 기도처럼 들렸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의료 시스템, 통신망, 행정 체계—이미 군부 쿠데타로 수축된 그 나라의 내부는, 이번 지진으로 완전히 멈췄다.
만달레이 종합병원은 곧 야외 간이 병원으로 바뀌었고, 피 묻은 환자들은 나무 그늘 아래 들것 위에 누웠다.
그 누구도 병명이나 진단을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눈빛으로 서로의 생존을 확인했고, 의사는 청진기가 아니라 손끝으로 맥을 짚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생명은 속절없이 꺼졌다.
부상자는 1,600명을 넘었고, 사망자는 공식 발표로만 694명.
숫자보다 더 많은 죽음이, 아직은 발견되지 않은 채 조용히 묻혀 있었다.
지진은 신을 믿지 않는다.
11세기부터 지켜온 바간의 불탑들이 무너졌고, 금빛 지붕은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유네스코가 보호하던 그 성역은, 인간의 손보다 먼저 땅의 손에 의해 쓰러졌다.
기도가 쌓였던 그 돌들이, 가장 먼저 주저앉았다.
이제 사람들은 향을 피우는 대신 물을 길었고, 합장 대신 손전등을 들었다.
방콕에서도 고층 건물이 흔들렸고, 어떤 임산부는 들것 위에서 아이를 낳았다.
태국의 거리에서 시작된 그 출산은, 이 비극의 한복판에서 피어난 생명이었다.
병원 바깥에서 태어난 아기는 울음으로 세상에 도착했고,
그 울음은 어쩌면 미얀마 전체가 삼키고 있던 비명을 대신 내뱉은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나라, 모든 조직의 도움을 받겠다.”
미얀마 군정 수장 민 아웅 흘라잉의 이 말은, 그동안 고립을 자처하던 체제가 흔들린 첫 번째 신호였다.
정치는 재난 앞에서 무력했고, 지진은 정권의 외벽까지 흔들었다.
도움은 체면보다 시급했고, 구호는 군사보다 우선이었다.
그간 군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던 서방 국가들도, 이번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은 지원을 약속했고, 유럽연합은 위성으로 구조 정보를 전송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구조대를 보냈고, 유엔은 500만 달러의 긴급 기금을 마련했다.
정권은 인정받지 않았지만, 시민은 지켜져야 했다.
도움은 체제에 대한 승인도, 정치적 타협도 아니었다.
그건 그저,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가장 단순한 윤리였다.
국제앰네스티는 경고했다.
군부는 일부 지역, 특히 저항 세력이 있는 곳에는 구조물자를 고의로 보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 땅에서는 고통조차 선별되었고, 죽음조차 균등하지 않았다.
구호는 한 손으로 건넸지만, 다른 손으로는 막히는 곳.
인도주의는 체제를 통과하면서 찢기고 있었다.
미얀마의 재난은 그저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우리도 지금, 산불로 마을이 사라지는 걸 보았고, 비상계엄 문건이 다시 떠오르는 사회의 균열을 겪고 있다.
정치는 흔들리고, 시민의 삶은 언제든 위태롭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미얀마를 바라보는 시선은, 곧 우리 사회의 감도를 측정하는 거울이다.
비극 앞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건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다.
도움은 장비보다 빨리 오고, 구호는 국가보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지금 우리가 내미는 손은, 단지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손은 다음 재난이 우리를 덮칠 때, 우리가 붙잡을 유일한 끈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잔해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아직 살아 있다.
그는 말을 잃었고, 빛을 잃었고, 이름조차 잊혀가고 있다.
하지만 그가 내는 마지막 숨결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에게 남기는 가장 오래된 증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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