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도 듣지 않은 울음을”
강동구 싱크홀 사고가 던지는 도시 윤리의 질문
- 무너진 것은 땅이 아니라, 응답하지 않은 태도였다
- 예고된 침묵 속에 한 생명이 사라졌다
- 도시는 계속해서 신호를 외면했다
- 사고는 우연이 아니었다, 경고는 이미 말하고 있었다
- 서울은 공사 중이었다. 그러나 생명은 완성된 이야기였다
모든 재난은 불시에 오지 않는다. 다만, 그 예고는 종종 들리지 않거나 애써 외면된다. 서울 강동구의 땅이 꺼졌을 때, 그곳에 있었던 건 단지 균열이 아니었다. 무심한 시선과 책임 없는 행정이 함께 무너져 내린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이 그 틈 사이로 가라앉았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길이었다. 평범한 하루의 끝자락, 서늘한 저녁 공기를 가르며 지나던 찰나, 시간은 그를 삼켰다. 도시는 그의 이름을 오래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땅은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 지침을 누구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2년 전의 보고서, 3년 전의 공문, 수차례의 민원. 모든 경고는 종이 위에 갇혀 있었다. 단층 파쇄대, 연약지반, 굴착 공사, 상수도관, 지하수 유입. 단어들은 기록되었으나, 어디로도 향하지 못했다. 행정의 시간은 사람의 삶보다 늘 한 박자 늦었다.
‘침하 우려’라는 경고는 그렇게 묻혔고, 땅은 조용히 준비했다. 자신의 붕괴를, 자신의 항의 방식을. 어떤 파열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시멘트 아래, 계측기 너머, 외면된 지층에서. 그 모든 신호는 허공을 헤맸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사고 이후, 말들이 쏟아졌다. 조사, 위원회, 대책, 개선. 그러나 이미 삶은 사라졌다. 한 명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로 축소될 수 없다. 그것은 도시가 삶을 대하는 방식, 시스템이 사람을 대체하는 구조의 거울이다. 허물어진 것은 구조물 이전에 감각이었다.
서울은 늘 공사 중이었다. 도시철도, 터널, 도로. 그러나 사람의 생은 공사 중이 아니었다. 매 순간 완결된 시간, 어느 구간도 생략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도시의 계산은 언제나 반올림되었고, 그 반올림의 끝엔 늘 누군가의 이름이 잘렸다.
모든 사고에는 도시 내부의 불균형이 녹아 있다. 그것은 숫자로 환산된 생명, 책임을 나누는 방식의 허술함이다. ‘위험도 4등급’이라는 수치가 분노보다 앞서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가. 숫자가 아닌 눈빛, 데이터가 아닌 직감이 먼저였어야 했다.
그날, 지표투과레이더는 현장에 없었다. 행정은 천천히 움직였고, 죽음은 너무 빨랐다. 기술의 부족이 아닌, 윤리의 결핍이다. 예측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측하고도 외면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더 큰 죄를 안고 있다.
가장 위험한 무능은 방치이고, 가장 조용한 폭력은 무관심이다. 그리고 그 무관심의 가장 높은 자리엔 서울시가 있었다. 여러 차례의 기술 보고서와 학술 검토는 그 지역의 위험을 분명히 지적했지만, 서울시는 예산 부족과 행정 절차를 이유로 실질 대응을 미뤘다. 서울시청 도시기반시설본부와 관련 부서들은 서로 책임을 나눴고, 그사이 결정은 길을 잃었다.
안전 점검은 ‘계획 중’, 조치는 ‘추후 검토’. 그 미뤄진 하루하루가 누군가에겐 마지막이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닌, 지속된 방기이며 태만이었다. 서울시는 ‘해당 구청 관할’이라는 말을 방패로 삼았지만, 반복되는 침하 위험을 인지하고도 시 차원의 통합 점검 시스템조차 작동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면책될 수 없다. 도시는 구역으로 나뉘지만, 시민은 구역을 나누지 않는다. 삶은 경계를 따르지 않고, 서울은 하나의 책임 주체로 존재한다. 행정의 선은 책임의 선이 될 수 없다.
도시는 다시 분주해졌다. 사고를 뒤로 미루고, 대책을 내놓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러나 그날 땅이 낸 목소리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도 듣지 않았던,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던 울음. 땅은 지금도, 언어 없는 언어로,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장비나 더 정교한 절차가 아니다. 그것들은 최소한의 수단일 뿐이다. 본질은 ‘듣는 일’이다. 땅의 갈라짐을, 기록의 행간을, 주민들의 두려움을. 우리는 아직 그 기술보다 더 본질적인 능력 공감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도시가 생명체라면, 지금 그것은 아프다. 이 병은 수치로 측정되지 않는다. 신뢰를 잃었고, 책임은 흩어졌으며, 생명은 경시되었다. 서울엔 정밀한 청진기가 필요하다. 땅의 떨림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의 아픔에 응답할 수 있는 감수성이다.
무너진 땅은 메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너진 사람의 자리를 되살릴 수는 없다. 우리는 이제 무너진 삶의 자리 위에 도시를 다시 지어야 한다. 침묵이 아닌 응답으로, 종결이 아닌 시작으로.
도시의 모든 땅은 기억의 층을 품고 있다. 그 위를 걷는 우리는 매일 무수한 경고를 지나친다. 강동구의 그 거리에도 수많은 ‘만약’들이 스며 있었을 것이다. 공사장 근처에서 들려오던 미세한 소음, 도로의 흔들림, 반복된 균열 신고. 그것들은 아무에게도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상의 소음 속에 묻혔고, 도시의 바쁜 리듬은 그 신호를 지나쳤다.
그러나 땅은 말하고 있었다. 침묵의 언어로,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그리고 그 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듣지 않는 자에겐 들리지 않지만, 그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도시는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이다. 금이 간 단층을 감지하는 센서 이전에, 사람의 고통을 먼저 느낄 수 있는 마음. 숫자보다 빠른 반응, 소음보다 선명한 책임의 울림.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또다시 침묵 위에 침묵을 쌓을 것이다.
도시는 여전히 말하고 있다.
들을 준비가 된 이에게만, 그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날 강동구의 땅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분명 이 한마디였다.
“나는 계속해서 신호를 보냈다.”
'iss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얀마 지진과 세계가 응답해야 할 이유 (1) | 2025.03.29 |
---|---|
경북 산불 진화율 현황 (2025년 3월 28일 낮 12시 기준) (0) | 2025.03.28 |
법복의 그림자: 사법 권력의 유착과 침묵 (0) | 2025.03.27 |
탄핵심판, 늦어지는 선고. 흐려지는 정의 (3) | 2025.03.27 |
경북 산불 재난, 문화재까지 삼키고 남은 게 없어 (2) | 2025.03.27 |